9월부터 어린이집에 가게 된 녀석은 심심하면 공부하겠다고 난리다.
학교 가면 토할 때까지 하게 될 것이 공부이거늘.
어쩌면 이 아이가 커서 고등학생 쯤 됐을 때는 학창 시절의 낭만이란 말 따위는 완전히 사어가 되어있겠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다른 건 몰라도 논술은 도와줄게.
수학, 영어는 기대도 하지 마라.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을 때 가장 난감한 이슈는 기자라는 직업군이 도마 위에 오르는 경우다. 최근 익스트림무비에 올라온 글 '기사 표절, 어떻게 생각하세요?'를 접하고 나니 여러가지 엉켜있던 고민이 한꺼번에 폭발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 역시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글밥을 먹겠다며 살아가는 사람 중 하나인 까닭에 익스트림무비의 문제제기의 대상에서 피해갈 수 없는 당사자이기도 하거니와, 표절 기사가 생산되는 내부 사정을 접해본 경험자로서 이 논의가 무언가 더 의미있는 결론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버렸다. 이는 분명 익스트림무비와 해당 기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든, 언제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표절 기사를 생산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버린 언론계의 고질병이다. 그렇다면 표절 기사에 대해 해당기자의 1차적 책임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는 '배포'의 권한을 가진 편집장에게 눈을 돌려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초등학생 독후감도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쓰는 요즘 세태를 감안한다면 익스트림무비가 언급한대로 저작권 인식이 희박한 개개인의 몰상식에 대해 딴지를 거는 것 자체가 우스운 꼴이 되어버리는 일은 허다하다. 표절 기사에 대해 이유 혹은 변명이 분분해지는 것 역시 이해할만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단순한 정보일 경우 그 출처가 해외언론인지 국내에 배포된 보도자료인지 아니면 어떤 이의 개인 블로그인지 타 언론사의 기사인지, 아니면 어디서 먼저 나왔는지 일일이 확인하기가 힘들고 애매모호해져 버리면 표절에 대한 가치 판단이 흐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신입 기자의 경우라면 수많은 정보 가운데서 어떤 것을 취사선택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또 이런 경우는 어떤가. 기사 표절, 이른바 '우라까이'의 대상이 한글 기사가 아니라 해외 기사일 경우 말이다. 몇몇 매체에서는 '해당 기사는 버라이어티, 할리우드 리포트, 박스오피스 모조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와 같은 단서를 달기도 하지만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수많은 해외 단신 중에는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유력 통신사의 '해외 통신원'이라는 명함을 걸고도 유명 사이트 뉴스를 문장 그대로 번역해 기사화하는 일도 적지 않다. 물론 이 경우에 '버라이어티에 따르면'이라던가 '할리우드 리포트에 따르면'이라는 수식은 생략되기 마련이다. 한국어에서는 특히 주어가 생략된 표현이 많은지라 '누가'는 빼버리고 '어떻게'만 남는 경우도 일상적인 기사 작성 방식으로 남아있다.
꼼꼼이 반성해보면 나 역시 할 말이 없다. 해외 단신은 여러사이트를 뒤져 정보를 최대한 집적해둔 후 우선순위대로 나열하는 식의 기사를 여러번 썼다. 변명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 이유래봤자 캐스팅 소식이며 주목받는 감독들의 신작 소식이며, 영화제 관련 소식에 대해서는 출장을 밥 먹듯이 가지 않는 한 도저히 취재 기사를 써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느냐 하는 정도. 좀더 범위를 넓혀 덧붙이자면 그런 기사를 '찍어내는' 일은 주로 신입 때 했노라는 핑계 정도다. 실제로 단신 뉴스들은 신입들의 몫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단신 기사를 쓰면서 파편적인 정보를 축적하는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보가 없으면 판단과 논평을 할 수 없다. 문제제기도 마찬가지다. 취재 기사를 쓸 수 있으려면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취재원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미처 취재의 노하우를 익히기도 전에, 게다가 공짜 정보의 수혜를 듬뿍 누리며 수십년간 살아오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표절 기자로 전락하는 경우에는 어쩌냔 말이다. 게다가 인쇄 매체의 경우 지면의 한계 때문에 "누구누구의 보도에 따르면"이라는 글귀는 삭제 1순위이기도 하니, 기자가 표절 기사 생산자가 되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질 일이다. 그 정도의 개념 탑재도 하지 않고 어떻게 기자가 됐느냐고 혀를 끌끌 차겠지만, 하물며 말 앞머리마다 "누구누구의 말에 따르면"이라는 출처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잔소리를 해대는, 깐깐한 선배라도 있었더라면 그런 무개념이 생겼겠는가.
다시 책임 문제로 돌아가보자. 편집장은 평기자들에게 있어서는 대선배이자, 자기 글을 마음껏 뒤바꿔 놓을 수 있는 절대 권력이자, 매체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기자는 기사를 제 멋대로 쓸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배포하는 것은 오로지 편집장의 판단이다. 기사 표절이 제작의 문제가 아니라 배포의 문제로 인해 더욱 큰 반성과 자책을 필요로 한다면, 책임도 그에 맞게 지워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러나 내외부적으로 아직 언론사의 편집장들은 책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기사 표절에 대한 다양한 사례를 경험했지만 대부분 편집장들이 나서는 때는 이미 사고가 터져버린 이후다. 사후약방문이라도 제대로 처리되면 좋겠지만 당사자에게 "어쩌다 '그 기자가 실수한 것'이니 이해를 바란다"는 정도의 사과를 한 뒤, 해당 기자에게 "담부터 조심해라" 정도의 조언을 해주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유추하건대, 기자 양성 시스템이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수많은 인터넷 매체에서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신문사에 귀속되지 않은 FILM2.0 역시 그러한 문제를 여러번 겪었다. FILM2.0은 한동안 온라인 기자와 주간지 기자가 따로 존재하는 구조를 유지해왔는데 온라인 기자가 해외 단신 기사를 출고하면 그 주 주간지에서 기자 이름만 바꿔 문장마저 똑같은 기사를 내보내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기사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유의미한 비평과 가치판단은 완전히 제거되고 오로지 정보로만 요약된 기사의 경우 본인 역시 "어디어디의 보도에 따르면"이라는 단서를 달지 않았기 때문에 항의하기 애매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항의를 한다고 해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마감 가운데 표절 책임 공방을 펼치는 것은 참으로 뻘스러운 짓이기도 했다. 이럴 경우에는, 다음부터 이런 정보성 단신 기사는 아예 기자 이름을 빼버리자던가 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옳았겠지만 이제껏 현실화되지 못했을 뿐더러 기자들 사이에서도 표절과 인용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하는 주제는 제대로 공론화되기 힘들었다. 그러니 어떤 기자가 동료 기자의 단신 취재 기사 여러 개를 인용없이 짜집기해 피쳐 기사로 떡하니 내놓는 일이 생기더라도 사과를 받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저 "속상해요" 수준의 넋두리로 시작해 "다음부터 주의하라고 일러뒀다"는 편집장의 위로 아닌 위로로 끝을 맺기 일쑤다.
이런 상황이 여러번 돌아가다보면 타 언론사에서 내 기사를 베끼던, 내가 누군가의 기사를 베끼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로 술렁술렁 넘어가는 게 뭐 이상한가, 그런 타성에 젖어버리고 만다. 기사 표절에 대한 인식이 경력이 쌓일수록 보다 구체적이고 명료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물렁해지기 일쑤다. 진짜로 정신 제대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표절 시비에 휘말리기 쉬운 신입 기자는, 말 그대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기사 생성기로 소비되는 일이 생활이다보니 문제의 기자가 된 속앓이만 하다가 사표를 쓰면 그뿐. 어느 누구 하나 이 문제에 대해 정색하고 덤벼들어 기준을 바로잡을 생각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보도자료 베껴쓰기, 기사 도용 문제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제안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 이런 문제가 또 불거진다면 비난의 화살을 편집장에게 돌리는게 어떤가 싶다. 기자는 태어나는게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현장을 누비며 발품을 판 기사를 인정해주는 매체에서 일해온 기자는 그렇게 한다. 표절 기사가 부끄러운 것이라고 선배 기자들이 스스로를 단속하는 모습을 본 후배 기자들도 그렇게 한다. 그런데 우리 언론 매체의 편집장들은 '좋은 기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으로써 얼마나 역할을 해내고 있나. 문제의 기자는 도마 위에 오를지언정, 문제의 기사를 데스크보고 배포한 편집장의 이름은 어디로 갔나. 후배에게 기자의 도덕성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책임, 표절 기사를 배포한 책임, 논란을 뻔히 보면서도 자신은 발뺌하려는 비겁함에 대한 책임을 지워야 하는건 아닐까.
초등학생 독후감도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쓰는 요즘 세태를 감안한다면 익스트림무비가 언급한대로 저작권 인식이 희박한 개개인의 몰상식에 대해 딴지를 거는 것 자체가 우스운 꼴이 되어버리는 일은 허다하다. 표절 기사에 대해 이유 혹은 변명이 분분해지는 것 역시 이해할만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단순한 정보일 경우 그 출처가 해외언론인지 국내에 배포된 보도자료인지 아니면 어떤 이의 개인 블로그인지 타 언론사의 기사인지, 아니면 어디서 먼저 나왔는지 일일이 확인하기가 힘들고 애매모호해져 버리면 표절에 대한 가치 판단이 흐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신입 기자의 경우라면 수많은 정보 가운데서 어떤 것을 취사선택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또 이런 경우는 어떤가. 기사 표절, 이른바 '우라까이'의 대상이 한글 기사가 아니라 해외 기사일 경우 말이다. 몇몇 매체에서는 '해당 기사는 버라이어티, 할리우드 리포트, 박스오피스 모조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와 같은 단서를 달기도 하지만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수많은 해외 단신 중에는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유력 통신사의 '해외 통신원'이라는 명함을 걸고도 유명 사이트 뉴스를 문장 그대로 번역해 기사화하는 일도 적지 않다. 물론 이 경우에 '버라이어티에 따르면'이라던가 '할리우드 리포트에 따르면'이라는 수식은 생략되기 마련이다. 한국어에서는 특히 주어가 생략된 표현이 많은지라 '누가'는 빼버리고 '어떻게'만 남는 경우도 일상적인 기사 작성 방식으로 남아있다.
꼼꼼이 반성해보면 나 역시 할 말이 없다. 해외 단신은 여러사이트를 뒤져 정보를 최대한 집적해둔 후 우선순위대로 나열하는 식의 기사를 여러번 썼다. 변명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 이유래봤자 캐스팅 소식이며 주목받는 감독들의 신작 소식이며, 영화제 관련 소식에 대해서는 출장을 밥 먹듯이 가지 않는 한 도저히 취재 기사를 써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느냐 하는 정도. 좀더 범위를 넓혀 덧붙이자면 그런 기사를 '찍어내는' 일은 주로 신입 때 했노라는 핑계 정도다. 실제로 단신 뉴스들은 신입들의 몫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단신 기사를 쓰면서 파편적인 정보를 축적하는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보가 없으면 판단과 논평을 할 수 없다. 문제제기도 마찬가지다. 취재 기사를 쓸 수 있으려면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취재원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미처 취재의 노하우를 익히기도 전에, 게다가 공짜 정보의 수혜를 듬뿍 누리며 수십년간 살아오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표절 기자로 전락하는 경우에는 어쩌냔 말이다. 게다가 인쇄 매체의 경우 지면의 한계 때문에 "누구누구의 보도에 따르면"이라는 글귀는 삭제 1순위이기도 하니, 기자가 표절 기사 생산자가 되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질 일이다. 그 정도의 개념 탑재도 하지 않고 어떻게 기자가 됐느냐고 혀를 끌끌 차겠지만, 하물며 말 앞머리마다 "누구누구의 말에 따르면"이라는 출처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잔소리를 해대는, 깐깐한 선배라도 있었더라면 그런 무개념이 생겼겠는가.
다시 책임 문제로 돌아가보자. 편집장은 평기자들에게 있어서는 대선배이자, 자기 글을 마음껏 뒤바꿔 놓을 수 있는 절대 권력이자, 매체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기자는 기사를 제 멋대로 쓸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배포하는 것은 오로지 편집장의 판단이다. 기사 표절이 제작의 문제가 아니라 배포의 문제로 인해 더욱 큰 반성과 자책을 필요로 한다면, 책임도 그에 맞게 지워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러나 내외부적으로 아직 언론사의 편집장들은 책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기사 표절에 대한 다양한 사례를 경험했지만 대부분 편집장들이 나서는 때는 이미 사고가 터져버린 이후다. 사후약방문이라도 제대로 처리되면 좋겠지만 당사자에게 "어쩌다 '그 기자가 실수한 것'이니 이해를 바란다"는 정도의 사과를 한 뒤, 해당 기자에게 "담부터 조심해라" 정도의 조언을 해주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유추하건대, 기자 양성 시스템이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수많은 인터넷 매체에서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신문사에 귀속되지 않은 FILM2.0 역시 그러한 문제를 여러번 겪었다. FILM2.0은 한동안 온라인 기자와 주간지 기자가 따로 존재하는 구조를 유지해왔는데 온라인 기자가 해외 단신 기사를 출고하면 그 주 주간지에서 기자 이름만 바꿔 문장마저 똑같은 기사를 내보내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기사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유의미한 비평과 가치판단은 완전히 제거되고 오로지 정보로만 요약된 기사의 경우 본인 역시 "어디어디의 보도에 따르면"이라는 단서를 달지 않았기 때문에 항의하기 애매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항의를 한다고 해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마감 가운데 표절 책임 공방을 펼치는 것은 참으로 뻘스러운 짓이기도 했다. 이럴 경우에는, 다음부터 이런 정보성 단신 기사는 아예 기자 이름을 빼버리자던가 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옳았겠지만 이제껏 현실화되지 못했을 뿐더러 기자들 사이에서도 표절과 인용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하는 주제는 제대로 공론화되기 힘들었다. 그러니 어떤 기자가 동료 기자의 단신 취재 기사 여러 개를 인용없이 짜집기해 피쳐 기사로 떡하니 내놓는 일이 생기더라도 사과를 받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저 "속상해요" 수준의 넋두리로 시작해 "다음부터 주의하라고 일러뒀다"는 편집장의 위로 아닌 위로로 끝을 맺기 일쑤다.
이런 상황이 여러번 돌아가다보면 타 언론사에서 내 기사를 베끼던, 내가 누군가의 기사를 베끼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로 술렁술렁 넘어가는 게 뭐 이상한가, 그런 타성에 젖어버리고 만다. 기사 표절에 대한 인식이 경력이 쌓일수록 보다 구체적이고 명료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물렁해지기 일쑤다. 진짜로 정신 제대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표절 시비에 휘말리기 쉬운 신입 기자는, 말 그대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기사 생성기로 소비되는 일이 생활이다보니 문제의 기자가 된 속앓이만 하다가 사표를 쓰면 그뿐. 어느 누구 하나 이 문제에 대해 정색하고 덤벼들어 기준을 바로잡을 생각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보도자료 베껴쓰기, 기사 도용 문제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제안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 이런 문제가 또 불거진다면 비난의 화살을 편집장에게 돌리는게 어떤가 싶다. 기자는 태어나는게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현장을 누비며 발품을 판 기사를 인정해주는 매체에서 일해온 기자는 그렇게 한다. 표절 기사가 부끄러운 것이라고 선배 기자들이 스스로를 단속하는 모습을 본 후배 기자들도 그렇게 한다. 그런데 우리 언론 매체의 편집장들은 '좋은 기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으로써 얼마나 역할을 해내고 있나. 문제의 기자는 도마 위에 오를지언정, 문제의 기사를 데스크보고 배포한 편집장의 이름은 어디로 갔나. 후배에게 기자의 도덕성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책임, 표절 기사를 배포한 책임, 논란을 뻔히 보면서도 자신은 발뺌하려는 비겁함에 대한 책임을 지워야 하는건 아닐까.
기우가 현실이 됐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언니들 말이다. TV 시리즈 이상의 미덕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던 스크린. 언니들은 돌아왔지만, 언니들을 바라보며 자라온 동생 입장에선 씁쓸하기 그지 없다. 코스모폴리탄의 비애와 환상에서 빗겨나 과시욕에 시달리는 언니들의 퇴화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육아 프로그램에서 본 내용. 첫째 아이는 엄마가 둘째 아이를 출산하게 되면 말할 수 없는 질투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한 전문가는 동생을 안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는 큰 아이의 분노를 '본처가 남편이 자기 앞에서 애첩을 끼고 있는 걸 목격하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럴 때 나타나는 가장 대표적인 행동이 '퇴화'라고 한다. 멀쩡하게 잘 크던 아이가 갑자기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된다거나, 말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이유없이 보채고 울고, 밥 대신 우유를 고집하고, 마냥 안아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다. 어린 동생과 비슷하게 행동함으로써 지난 날 자신이 독차지했던 엄마의 애정과 관심을 되찾고 싶다는 욕구의 발현이다.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에 말 그대로 몸부림을 친다는 것이다.
사랑 받고 싶어 몸부림치는 것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 물론 인지상정이다. 자연스런 성장의 흐름을 저버릴 정도라니 그 마음이 오죽하겠나.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퇴화는 어쩐지 이해보단 씁쓸함이 앞선다. 영화 <섹스 앤 더 시티>의 언니들 말이다. 혹자는 구두 콜렉터에 대한 거침없는 커밍 아웃을, 혹자는 뉴욕의 칼럼니스트란 도도한 정신 노동자의 한량 라이프를, 혹자는 명품과 보세 패션의 상큼한 앙상블 때문에 캐리와 친구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열 두 제자 모시듯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 여성의 바이블이란 수식어를 달았다면, 그 현대 여성들 자존심 좀 세워줬으면 좋았을 뻔 했다.
TV 시리즈에서는 30대 여성이 20대 여성과의 어쩔 수 없는 경쟁 구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솔직하고 유의미한 질문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 속 캐리는 10대, 혹은 20대 소녀들 앞에서 자신의 지혜를 자랑스러워하기 보다는 근사한 드레스를 자랑하거나 루이비통 가방을 선물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할 뿐이다.
TV 시리즈에서는 30대 여성이 20대 여성과의 어쩔 수 없는 경쟁 구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솔직하고 알려졌다시피 영화 <섹스 앤 더 시티>의 주된 화두는 캐리의 결혼'식'이다. 캐리가 빅과 10년 간의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기로 했다. 대단한 프로포즈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싱글 라이프를 포기하는 것에 대한 큰 고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책도 세 권 냈겠다, 더 이상 사회적 입지 마련에 대한 강박증을 가질 필요가 없어진 40줄의 캐리는 다시 충실한 결혼 판타지의 노예가 되기로 한다. 단 하나의 이유, 비비안 웨스트우드 웨딩 드레스 때문에. 알맹이를 챙기기보단 겉치장에 몰입하는 일이 잘 될 턱이 있나. 결혼'식'은 끝내 처참하게 무산되고 만다. 그리고 자문한다. 내가 왜 그렇게 결혼식에 목매달았더라?
<섹스 앤 더 시티>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패션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겠지만, 그 패션이 전부가 되어버렸을 때도 과연 가능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언니들 왜 이러실까 싶었다. 인기에 힘입어 현실감을 팽개쳐버린 그녀들은 (더 이상 섹시해 보여야 할 이유를 찾지 않는 미란다마저도) 화려한 의상 속에 깊숙이 몸을 묻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화려한 드레스 자락은 하염없이 바람에 흩날린다. 이제껏 <섹스 앤 더 시티>의 빅팬을 자처해온 이 땅의 여자들을 졸지에 할리우드 패션 앤 뷰티 클라스 학생으로 전락시키는 듯한 태도는 내용 면에서도 다르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됨으로써 뉴욕의 40대 싱글 여성도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보이고자 했던 캐리는 지난 TV 시리즈에선 교훈 축에도 끼지 못했던 주제를 가지고 급기야 자신의 신파 로맨스를 완성한다. 누군가의 세번째 결혼과 누군가의 첫번째 결혼에 대한 기대치는 다를 수 있다는 것(빅), 세상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것(사만다), 부부생활의 중요성(미란다), 남들에 비해 너무 행복하면 오히려 불안하다는 것(샬롯) 같은 이야기는 너무 뻔하기도 하거니와 슬쩍 주제만 던지고 대충 수습하며 할 얘기 다 했다는 투로 흘러간다. 30분 분량 내에서도 캐리의 의문이 인물들 사이에서 유기적으로 얽히며 생생한 현실감을 얻었던 구성 방식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인물들의 고민은 각각 따로 돌며 난데없이 치고 빠지기 일쑤. 네 명의 친구들을 하나의 고민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여성 공동의 화두와 유의미한 해법으로 귀결했던 미덕은 더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패션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겠지만, 그 패션이 전부가 되어버렸을 때도 과연 가능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언니들 왜 이러실까 싶었다. 인기에 힘입어 현실감을 팽개쳐버린 그녀들은 (더 이상 섹시해 보여야 할 이유를 찾지 않는 미란다마저도) 화려한 의상 속에 깊숙이 몸을 묻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화려한 드레스 자락은 하염없이 바람에 흩날린다. 이제껏 <섹스 앤 더 시티>의 빅팬을 자처해온 이 땅의 여자들을 졸지에 할리우드 패션 앤 뷰티 클라스 학생으로 전락시키는 듯한 태도는 내용 면에서도 다르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됨으로써 뉴욕의 40대 싱글 여성도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보이고자 했던 캐리는 지난 TV 시리즈에선 교훈 축에도 끼지 못했던 주제를 가지고 급기야 자신의 신파 로맨스를 완성한다. 누군가의 세번째 결혼과 누군가의 첫번째 결혼에 대한 기대치는 다를 수 있다는 것(빅), 세상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것(사만다), 부부생활의 중요성(미란다), 남들에 비해 너무 행복하면 오히려 불안하다는 것(샬롯) 같은 이야기는 너무 뻔하기도 하거니와 슬쩍 주제만 던지고 대충 수습하며 할 얘기 다 했다는 투로 흘러간다. 30분 분량 내에서도 캐리의 의문이 인물들 사이에서 유기적으로 얽히며 생생한 현실감을 얻었던 구성 방식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인물들의 고민은 각각 따로 돌며 난데없이 치고 빠지기 일쑤. 네 명의 친구들을 하나의 고민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여성 공동의 화두와 유의미한 해법으로 귀결했던 미덕은 더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언니들을 보게 되다니. 샬롯과 미란다의 결혼식보다도 캐리의 결혼식을 훨씬 호들갑스럽게 했어야 했던 이유가 고작 비비안 웨스트우드 웨딩 드레스 때문이라면 언니들 우정이 너무 얄팍한거 아닌가.
그래 어쩌면 딱 여기까지가, 이 도시가 여성을 이해하는 깊이일지 모른다. 흔히 '칙릿'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길 원하는 여성용 문화상품의 이면에서는 종종 비아냥 섞인 뉘앙스가 읽힌다. 적당히 최신 유행 상품과 현실 생활의 누추함을 끼워맞추면 여자들 입맛을 맞출 수 있겠지 하는 안일한 계산들 말이다. 저 잘났다는 뉴욕이 이럴진데, 아니 뉴욕은 그렇다 치고 서울은 뭐 다른가. 얼마전 TV 드라마로 시작된 한국 칙릿계의 간판스타 <달콤한 나의 도시>도 내 눈엔 왜이리 마뜩치 않은 것일까. 극중 은수(최강희)가 옛 애인의 결혼식 날 출근을 했다며 평일 지하철 열차에서 고생을 하는 장면(대관절 어느 평범한 결혼식이 평일 오전에 열린단 말인가), 한강변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의 높은 하이힐을 바라보며 요즘 애들 관절 걱정을 하던 장면(바로 몇 분 전에 비친 그녀의 하이힐도 엄청났다) 등 어설픈 설정들은 '칙릿' 코드들이 어떻게 간편한 공산품으로 변질되는지를 단숨에 드러내고 만다.
칙릿 대중 문화 상품 속 그녀들의 누추한 현실이 판타지를 위한 도구로 변질되는 것을 보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여성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판타지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누군가의 계산은 열광은 커녕 분노를 일으킨다. 하긴, 어려보여야 사랑받는다는 식의 동안 신드롬에 빠진 도시에서 정신적 퇴화 쯤이야 별 일 축에 속하기야 하겠나. 송순진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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